저희 또래들 (1980년대에 태어난 세대) 에게 배트맨이 알려진 계기는 애니메이션보다 1990년 경에 나왔던 팀버튼 감독의 헐리우드 영화 쪽이었던 것 같습니다. 감독 특유의 우울하고 기괴한 영상미가 캐릭터 매력과 잘 어우러져서 명작 반열에 올라선 영화로 평가받고 있죠.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쿨함에도 반했지만, 배트맨의 내용물(?)인 브루스 웨인의 커다란 저택, 그리고 꼬박꼬박 존대말해주며 밥주고 청소해주고 아프면 치료해주던 그의 집사 '알프레드'의 존재도 당시의 저에겐 굉장히 신선하게 느껴졌었습니다. 아니 지금이 무슨 중세시대도 아니고 왠 주인님 타령?
알프레드 페니워스 (Alfred Pennyworth) by Alex Ross
설정상의 알프레드는 3대 째 웨인가의 집사로 일하고 있는 사람이며, 전직 특수부대원, 용병, 군의관, 배우 등의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덕분에 각종 군사지식과 전략에 능통하고 브루스의 부상을 직접 치료해줄 수도 있는 슈퍼집사로 활약 중입니다.
이렇게 순하게 생겼어도 나름 전투력 좀 있음 데헷 (by Jim Lee)
천애고아로 자라서 비뚤게 성장할 수도 있었던 브루스 웨인을 어릴때부터 돌봐주고, 잘못된 모습을 보이면 혼내기도 하며,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다 가진 브루스에게 유일하게 없는 한 가지인 '사랑'을 주는 인물입니다. 또한 그래픽 노블 등에서 비춰지는 (농담이라곤 1mg도 안섞인) 배트맨의 무거운 분위기에 특유의 재미없는영국식 농담을 얹어서 자칫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는 극의 밸런스를 유지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고 계시기도 합니다.
아마 만화를 통해 배트맨을 접하지 않은 분들께서 익숙해할 알프레드의 얼굴은 아마 이 분일 겁니다.
나 기억하지 이놈들아??
'배트맨 - 배트맨리턴즈 - 배트맨포에버 - 똥망한배트맨과로빈'까지 연달아서 4편의 배트맨에 알프레드 역으로 분하신 Michael Gough (마이클 고프) 님이십니다. 팀 버튼이 2탄을 마치고 감독 교체된 후에 스탭 및 배우진이 거의 모두 다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만큼은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셨지요. 따뜻한 인상이 참 포근해보였던 분이었는데, 지난 2011년 노환으로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Rest in peace, Sir.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
배트맨과 로빈의 기록적인 폭망 (배급사인 워너브라더스사가 문을 닫기 직전까지 몰릴 정도로 심각하게 망했었다고 합니다)으로 인해 한동안 배트맨 프랜차이즈는 거의 아무도 시나리오를 거들떠보지 않는 Dead end 급의 흑역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과 데이빗S고이어가 새로운 각본을 들고 워너의 문을 두드리기 전까지 무수한 프로젝트들이 생겨났다 엎어지고 생겨났다 엎어지고를 반복했다고 하네요.
새로 만들어진 배트맨 Batman Begins에서 감독이 알프레드 역으로 낙점한 배우는 감독의 이전영화인 Prestige에서 마술기술자 역을 맡았던 마이클 케인 경이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한 번 작업을 같이했던 배우들과 지속적인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놀란 감독과 함께 하는 마이클 케인 경은 흡사 공무원 스탠스입니다. 내년 개봉할 '인터스텔라'에도 출연하신다고 하니 말 다했습니다.
내가 바로 알프레드이로소이다 - 마이클 케인 경
새로운 배트맨 프랜차이즈에서 마이클 케인 경은 원작 팬들이 기억하는 알프레드의 그 모습 그대로를 너무나 잘 살려냈습니다. 집사이자 부모님이자, 친구이기도 하며, 브루스가 어두운 구석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을 막아주는 존재였죠. 항상 그의 옆에 있어주는 따뜻한 할아버지 역할 (원래 설정엔 4-50대 중년인데 할아버지가 됐죠) 로 이만한 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 마지막에 브루스의 무덤 앞에서 오열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숙연하게 만들더군요 ㅠ
"브루스 웨인 : 아직도 저 포기 안했어요?" "알프레드 페니워스 : 절대 안하죠"
<배트맨 비긴즈>에서의 "우리가 넘어지는 이유는, 일어서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입니다."라는 대사와, "아직도 저 포기 안했어요?"라는 브루스의 말에 "절대로요.(NEVER)" 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그야말로 명대사. 후속작인 <다크 나이트>에서도 배트맨 활동을 접기로 한 브루스 웨인과 아지트를 빠져나가면서 "경찰이 저도 공범으로 잡아가겠군요." / "공범이라니요, 이거 다 아저씨가 시켰다고 할건데요?"라며 시시덕거리는 모습은 친구이자 아빠같은 느낌을 줍니다.
마이클 케인 경은 젊은 시절 영국에서 션코너리와 쌍벽을 이루는 '잘생기고 거칠고 섹시한' 액션 스타였습니다. 흔히들 주드로의 영화로 알고계시는 '알피'캐릭터도 이 분의 역할을 주드로가 벤치마킹해서 만든거죠. 젊은 시절의 야성미는 나이를 먹어 훈훈한 지성미로 탈바꿈 했습니다. '바람직하게 나이먹는 법'에 대한 좋은 레퍼런스가 되어주셔서 마냥 감사하네요.
다크나이트 트릴로지 팬들에게 영원히 좋은 아버지로 기억될 알프레드
마이클 케인 경의 뒤를 이어 Fox의 새 드라마인 Gotham에도, 알프레드가 캐스팅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드렸었는데요. 영국 출신의 배우인 션 퍼트위 (Sean Pertwee)가 그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Fox의 새 드라마 'Gotham'에서 알프레드 역을 연기하게 될 Sean Pertwee
알프레드 역을 맡기에는 너무 이미지가 강한 것 아닌가 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보니 또 괜찮을 것 같기도 하네요. 오른쪽 사진은 Rocksteady社의 게임인 Arkham City에 등장하는 알프레드의 모습입니다. 선량하지만 강단있는 느낌을 주는 인상이예요.
그런데, 이 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고 생각해보니
영화 '이퀼리브리엄'에서 '영도자'역할로 나왔던 인물이었습니다.
뭐래는겨 이 개새ㄲ가
이퀼리브리엄이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신 분들을 위해 설명 드리면
건 카타 (Gun Kata). 기억하시나요.
영화 '이퀼리브리엄'의 주인공인 크리스천 베일
'이퀼리브리엄'에서 '영도자(Father)' 역을 연기했던 션 퍼트위
'감정이 통제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 SF영화. 춤인지, 무술인지 경계가 모호한 간지나는 무술인 Gun Kata를 소개했던 영화. 우리나라에서만 유독 패기롭게 '매트릭스는 잊어라!' 따위의 자극적인 홍보문구로 개봉하여 폭망했던, 하지만 매니아들과 평론가들로부터는 꽤 좋은 평가를 받았던 '이퀼리브리엄'의 흑막인 영도자 역할로, 국민들을 세뇌시키는 스피치를 줄줄히 읊고계시던 그 분입니다.
이퀼리브리엄이라는 영화는 배트맨과 인연이 많은가봅니다. 주인공인 크리스천 베일은 배트맨이 됐고, 악역인 영도자는 알프레드가 됐으니까요. 끼워맞추려면 한도끝도 없는 비틀즈코드 st.
이어서, 2016년 개봉할 Man of Steel의 후속작인 Batman vs. Superman (가제)에 등장할 알프레드 역할도 캐스팅이 됐는데요. 그 캐스팅이 무려 제레미 아이언스입니다. 후덜덜한 캐스팅이네요.
제레미 아이언스의 DKNY 광고. 남자가 봐도 참 우아합니다.
이 캐스팅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가, '아 괜찮기도 하겠네?' '그래도 좀 아닌가?' 하며 사람 오락가락하게 만듭니다. 알프레드를 연기하기엔 이 분 너무 색기가 넘치는게 아니신가 하다가도, 안경 쓰고 계신 모습을 보면 어딘가 심약한 느낌을 지닌 원작 만화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거든요.
"주일은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주인님?"
2016년 개봉 예정인 Batman vs. Superman은 아직 그 원고 작업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이라, 그들이 알프레드 캐릭터를 어떤 방식으로 발전시킬 지는 알 수 없겠으나, 배우가 (병풍이 되고 싶어도 그렇게 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지닌) 배우인지라 큰 걱정은 안되네요. 예상 외로 굉장히 잘 어울릴 것 같습니다. 캐릭터 특유의 강한 영국 억양도 매력적으로 소화하실 것 같고요.
지금까지 알프레드를 연기한, 혹은 연기할 배우들의 면면을 간략히 리뷰해봤습니다. 해외 덕후들 쓰레드에는 캐스팅을 놓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지만,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어쨌거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묵묵히 티나지 않게 배려해주고, 자식이 부디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거 잊으신건 아니지요 도련님? (게임 'Arkham Origin' 中)"
최근 발매됐던 게임인 Arkham Origin 에서는, 배트맨의 정체를 간파한 베인의 습격을 받아서 (배트맨이 자리를 비운동안) 배트케이브가 반파당하고 알프레드는 사망(..) 직전에 이르는 모습이 나옵니다. 이 장면에서, 뒤늦게 배트케이브에 도착한 브루스의 반응이 압권인데요. 항상 말할 때 무게를 잡고 큰 소리를 내지 않는 브루스 웨인이 처음으로 어린 아이처럼 애타게 "알프레드! 알프레드!"라고 고성을 지르며 미친 사람처럼 알프레드를 찾아 배트케이브를 뛰어다니는 장면은 이 게임의 명장면들 중 하나입니다. 고아로 자란 브루스에게 그가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라 유독 기억에 오래남는 것 같네요.
피터파커가 영원히 10대 소년으로 살듯, 브루스 웨인도 영원히 30대 중반으로 이 지구에 존재할 것입니다 (다크나이트리턴즈에서는 환갑노인 브루스웨인도 나오긴 하지만 일단 이런건 예외). 연기자 마이클 고프 선생은 작고하셨지만, 캐릭터 알프레드 페니워스는 항상 아버지같은 인자한 모습으로 브루스 웨인의 곁을, 그리고 우리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어떤 매체에 등장하던 저는 알프레드가 가족처럼 반가울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