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화는 ‘입’으로 막는 게 아니다

우리 사는 이야기 2014. 3. 11. 09:45
당사자들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동안 내 돈은, 우리 국민의 세금은 줄줄 새어 나간다. 매번 이런 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고난, 공기업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최근 150여 명의 20대 친구들과 만날 기회를 가졌다. 20대라고 했지만 정확히 말하면 30대 초반도 섞여 있는 신입사원들이었다. 이런저런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 자연스럽게 코레일 철도 파업과 의사들의 파업 이야기를 꺼냈고, 이어 ‘공기업 민영화’라는 현재 대한민국의 핫이슈에 직면했다. 이들의 생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결과는 의외로(?) 명확했다. 80퍼센트 이상의 친구들이 “민영화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논거도 충분했으며, ‘의료(보험) 민영화’나 ‘인천공항 민영화’ 등에 대해 상당한 식견을 소유한 친구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 순간 문득 17년 전 그때가 떠올랐다. 1997년 말, ‘IMF 사태’가 한국 경제를 초토화시키고 있을 때 사회 첫발을 내디뎠던 신입사원의 모습 말이다.
그때 우리도 한 강사로부터 공기업 민영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거의 한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내용은 지금과 딴판이었다. 우린 너나 할 것 없이 “어서 빨리 민영화를 해야 합니다”라고 열변을 토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 1997년 이후 한국 사회의 민영화는 급물살을 탔다. 포항제철은 포스코로, 한국통신은 케이티(KT), 담배인삼공사는 케이티앤지(KT&G), 한국중공업은 두산중공업 등으로 바뀌었다.
10년 후, 혹은 20년 후 미래의 ‘신입사원’들도 연수원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을지 모르겠다. 그들은 뭐라고 답할까. 민영화를 막아낸 것이 자랑스럽다? 아니면 ‘그때 민영화를 했어야 하는데…’라는 후회? 어쩌면 민영화란 이슈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모두 민영화되었거나, 아니면 모두 공공의 소유가 됐을 수도 있으니까.

 

공기업은 태생적으로 방만해진다 지금 미국은 전 국민 의료보험, 일명 ‘오바마 케어’를 놓고 민주당과 공화당의 치열한 싸움이 한창이다. 시장만능주의의 본고장 미국에서 공적 의료보험 제도를 실시하겠다는 사실 자체가 이젠 별로 놀랍지 않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는 이미 식상해졌고, 미국 다녀온 사람들이 워낙 많아 그곳의 병원이라는 존재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다.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 누가 뭐래도 난 최고라고 생각한다. 북유럽 몇몇 국가에 더 좋은 공적 의료보험이 있다고 하지만 인구, 경제력 대비로 보면 세계 최고다. 우린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감자 캐는 할머니가 대한민국 최고 실력의 의사에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나라니까. 하지만 지금 우린 미국과 정반대로  ‘의료 민영화’에 대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왜일까. 오바마조차 “한국 의료보험 제도가 롤 모델”이라는 판에 왜 민영화 이슈가 떠오르는 것인가.
공기업은, 그리고 좀 더 범위를 넓혀 사회보험 제도는 필연적인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다. 절대 권력이 절대적으로 부패하듯, 절대적으로 방만해진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설립 목적 자체가 이윤 추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95조원의 부채로 매일 64억원의 이자를 내는 한국전력을 보자. 성과를 내는 방법? 간단하다. 전기료를 올리면 된다. 그렇지만 이걸 하지 않기 위해 공기업으로 만든 것이다. 전 국민이 십시일반 모은 세금으로 운영하면서 저렴하고 안정적인 전기요금을 부담하고자 공기업화시킨 거다.
그러나 바로 이 틈을 수많은 ‘사악한 세력’이 파고든다. ‘전기료를 못 올려 경영이 악화됐다’는 핑계 속에 냄새 나는 부패와 직원들의 ‘흥청망청’이 숨어든다. 승리한 정권은 논공행상의 일환으로 개국공신을 사장에 앉히고, ‘낙하산 인사’의 꼬투리를 잡은 강성 노조는 복지 혜택을 뜯어낸다. 그렇게 5년이 흐르는 동안 세금은 줄줄 새고, 정권이 바뀌어도 변하는 건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국가의 괴상한 사업에 공기업이 동원되면서 부실 ‘구멍’은 더 커진다. 가령 지난 2007년 부채비율이 16퍼센트에 불과했던 건실한 한국수자원공사는 2009년 이후 4대강 사업에 7조원 이상 쏟아부으면서 한순간 부실 공기업의 대명사가 됐다. 코레일 역시 용산 역세권 사업 정책 실패로 6개월 만에 3조원 넘는 빚을 떠안았다.
이런 상황에 해당 공기업 직원들은 사회적 비난이 기가 찰 것이다. 이들은 정책 실패의 책임을 본인들이 부당하게 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기업 직원들, 당신들이 해 처먹은 게 얼마냐?”고 몰아붙이면 “왜 정치인들의 책임을 우리가 져야 하냐?” 며 맞선다. 여기에 억지 사업을 추진했던 당사자들은 “정책이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며 발을 뺀다. 타협 자체가 불가능한 평행선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들 관계 당사자들이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티격태격하는 동안 내 돈은, 우리 국민의 세금은 줄줄 새어나간다. 매번 이런 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타고난, 공기업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정말 범인은 ‘민영화’인가?  물론 이런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국민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나가면 못 이룰 일이 무엇이랴! 예를 들어 코레일 노조는 임금 인상 폭을 줄이고 정년 연장을 하지 않고, 과도한 복지도 줄인다. 또 정부는 낙하산 인사를 하지 않고, 코레일에 넘긴 쓸데없는 부실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한다. 그러면서 차츰 부채 비율을 줄여 재정 건정성을 확보한다. 국민은 열심히 세금 내고, 또 즐겁게 철도를 타고 다닌다. 베스트 시나리오다.
하지만 쉽지가 않다. 아니, 이런 선순환 구조가 돌아가려면 이미 벌써 돌아갔다. 누구 때문인가. 정부 탓? 꼴통 보수 탓? 코레일 직원들 탓? 국민 탓? 우리 모두의 탓? 그런데 특이한 건, 우린 반성도 없이 이 모든 논의의 정점에 ‘민영화’를 내세웠다. 일종의 유령 같은 녀석을 놓고 두 패로 갈려 죽어라 물어뜯고 싸운 격이다. 그래서 코레일 철도 파업이 끝났지만 달라진 건 하나도 없다.
의료 민영화 이야기를 해보자. 분명 밝혀두지만 의료 민영화에서 의료보험 민영화라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려는 조짐만 보여도 난 분연히 일어나 거리로 나설 것이다. 하지만 이에 앞서 분명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분명 우린 모두 열심히 건강보험료를 낸다(샐러리맨은 더 할 말이 많다). 의사들도 열심히 일한다. 그렇다. 지금 책정돼 있는 보험수가(건강보험공단이 의료 행위에 지불하는 대가)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점은 일견 타당하다. 정부도 수가 인상에 대한 생각이 있단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안 그래도 어려운 건강보험 재정은 더 악화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보험료 인상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더 많은 돈을 거둬들여야 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은 보험수가 인상에 대한 토론 대신, 정부가 발표한 ‘원격진료’나 ‘영리병원’ 허용 정책을 의료 민영화 혹은 의료보험 민영화의 전 단계라고 몰아붙이고 있다.
정말 민영화 탓인가. 돈 많이 버는 의사들의 밥그릇 챙기기는 아닌가. 건강보험공단 직원들이 과도한 혜택을 누리면서 내 보험료를 축낸 건 아닌가. 누구는 6개월에 병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데 병원을 내 집 드나들듯 하는 일부 국민 탓은 정말 아닌가.

 

“민영화? 너 자본을 감당할 수 있겠냐?” 솔직히 고백하면 나를 비롯한 X세대, 그리고 선배인 386세대는 민영화에 대해 감히 할 말이 없다. 우린 꽤 많은 공기업을 민영화란 명목으로 자본에게 내준 전력을 갖고 있다. 왜 한국 주식시장은 외국인들의 ATM 기기가 됐을까. IMF 이후 무차별적으로 해외 거대 자본에게 시장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더 안타까운 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정말 허심탄회하게 고해성사할 게 있다면 엄밀히 말해 지금까지 이뤄졌던 이런 민영화(혹은 자본의 득세)의 책임은 결국 우리에게 있었다는 점이다. 그랬다. 우리 탓이었다. 우리의 방만함, 욕심, 태만, 무지, 이기주의 등이 결합되면서 우리끼리 물어뜯고 싸우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져버린 결과였다. 부끄럽고, 안타깝다.
최근 민영화 이슈가 전 사회를 휩쓸고 있다. 그리고 일각에선 민영화 반대를 외쳐야만 정의로운 사람으로 비치는 것 같다(과거 X세대들이 ‘공기업 민영화’를 주장해야만 똑똑한 녀석으로 평가된 것과 비슷하다). 긍정적인 현상이다. 난 자본이 얼마나 사악한 줄 잘 알고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민영화는 우리 삶을 통째로 노예화시킬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민영화를 반대하는 실천적 모습은 달라져야 한다. 정말 크게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린 민영화란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끼리 편을 나누고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이러면 안 된다. 한국전력을 지키고 싶은가. 경제 수준에 비해 상당히 낮은 전기요금을 계속해서 ‘누리고’ 싶은가. 그러면 일단 쓰지 않는 전기 코드부터 뽑는 사소한 습관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건강보험 제도를 정말 지키고 싶은가. 그러려면 지역 가입자들은 소득을 속이지 않고 보험료를 잘 내고, 의사들은 탐욕을 조금 버리고, 어르신들은 습관적으로 병원을 옆집 드나들 듯 찾아가지 않고, 공단 직원들은 제발 재정 관리 좀 잘 하는 등 우리 스스로의 뼈를 깎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이런 과정은 뛰어넘은 채 패거리로 나뉘어 진영논리를 쏟아부으며 민영화 반대, 민영화 찬성만 외친다면 결과는 뻔하다. 17년 전 이미 혹독하게 겪어보지 않았던가.
자본은 숨죽이고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샐러리맨들이 “우리만 봉이냐? 따로 떼어서 의료보험 가입하겠다”고 하고, 의사들도 “만날 우리만 나쁜 놈 취급하냐? 의료보험 자체가 모순이다”라고 하고, 공단 직원들도 “돈 엄청 벌고, 보험료 안 내는 놈들이 나쁘지, 왜 우리한테만 뭐라고 해요?”라며 뿔뿔이 흩어지는 순간을 말이다. 바로 이때, 민간 의료보험 시장은 활짝 펼쳐질 것이다.
영화 <신세계>에서 황정민이 죽어가면서 이정재에게 그런다. “만에 하나 천만 분의 하나라도 내가 살면 어쩌려고 그러냐? 나 감당할 수 있겠냐?”라고. 민영화의 총 지휘자는 인간이 아니라 자본이다. 지금 우린 정말 자본을 감당할 수 있는 건가.

 

정말 각오들 돼 있습니까? 신입사원들을 위한 강의 마지막에 난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 정말 각오는 돼 있나요?”라고. 정말 궁금하다. 진짜 우린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인가.
‘민영화는 절대 안 된다’는 쪽이나, ‘공기업은 다 민영화시켜야 한다’는 쪽 모두 처절한 각오를 하고 있어야 한다. 공기업은 태생적으로 방만하기에 민영화를 통해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사람들은 뒤이어 찾아올 자본의 채찍질에 어금니 꽉 깨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반대로 민영화를 반대하는 쪽에선 정말이지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사악함을 억누르기 위해 중세 수사처럼 스스로의 등에 채찍을 내리쳐야만 한다. 이런 각오가 없다면 스스로 붕괴될 일만 남아 있다. 그것도 ‘양빵’으로 당한다. 미국을 보면 안다. 의료보험 민영화를 통해 개인 자산을 다 털어먹은 자본은 이제 오바마 케어를 통해 세금을 털어먹으려 변신을 꾀하고 있으니까.
난 이미 한 번 패배한 세대다. 그래서 또 당하기가 싫다. 지금 우린 민영화란 좀비와 싸우고 있다. 이런 싸움에서 승리하려면 입으로만 쫑알대는 것으론 턱없이 부족하다. 작은 것부터 생활 속에서 실천에 옮기자. 재미난 것은 민영화 반대든, 혹은 민영화 찬성이든 스스로 반성하고, 고치고, 개혁하는 순간 우리가 누리는 ‘공공서비스의 질’은 반드시 개선된다는 사실이다. 인천공항과 김포공항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럼 우린 소기의 목적을 이룬 셈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때 민영화 이슈는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작은 한 줄기 빛에 그 칠흑 같은 어둠이 한순간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출처 : 에스콰이어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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